30 June 2004. pp. 271~296
Abstract
This report will discuss the movement of the Huayan doctrine in Huiyinyuan temple 慧因院 (also called Gaolisi temple 高麗寺) at Hangzhou, which was regarded as the center of the Huayan doctrine in the Song Dynasty, after Jingyuan 淨源the reviver of Huayan entered as the chief priest. At Huiyinyuan temple, many Huayan commentaries, studied and written according to literatures brought by Uich’on義天 of Koryo高麗 during the Northern‐Song Dynasty, were collected. The temple also had a symbolic meaning for the revival of Huayan, since it was the first temple in Hangzhou to be admitted as Shifang jiaoyuan 十方教院 for bringing down the Huayan teachings. Moreover, the majority of existent Huayan literatures of the Song Dynasty were written by monks, related with Huiyinyuan in the Southern‐Song. This shows how doctrinal discussions and teachings were extraordinarily active at the temple.In the Southern‐Song Dynasty, Shihui師會 the monk of Huiyinyuan, had doctrinal dispute with Guanfu觀復 the chief priest of Huayansi temple at Chengjiang, over the interpretation of Tongjiao 同教 and Biejiao 別教. Soon many appeared at Huiyinyuan to succeed Shihui’s school, such as Shanxi善熹 and Xidi希迪. They emphasized the superiority of the Huayan doctrine and were quite different from the so‐called Synthetic Buddhism developing around at the time. They adopted Jingyuan’s Theory of Seven Patriarchs of Huayan華嚴七祖説and showed common sectarian characteristics. The interesting point, as seen clearly from Shanxi’s case, is that Shihui’s doctrinal system received much recognition after they moved to Huiyinyuan. But we may not be able to say that this trend of doctrinal system, made by Shihui’s school, was traditional to the Huiyinyuan temple. Monks later on in Huiyinyuan, did not exactly bring down the same doctrinal system. Therefore, it was unique to Shihui’s group, and was a trend that created a sensation at Huiyinyuan at one time. It is difficult to make clear the origin of their doctrinal system, but several facts show the possibility that Huayan doctrine was brought into Huiyinyuan temple from Koryo, or Liao遼 via Koryo.
본고는 북송대 화엄을 부흥시킨 진수 정원(晉水淨源, 1011-1088)이 만년에 주석한 이후, 송대 화엄학의 중심지로 부상한 항주 혜인원(杭州 慧因院 일명 고려사)에서 전개된 화엄학의 동향에 대해서 논하였다. 혜인원은 항주에 최초로 화엄을 전한 시방교원(十方教院)에 승인된, 화엄부흥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사원이며 원대에까지 계속 융성하였다. 송대에서의 화엄학 중흥의 계기는 정원이 그 간에 망실된 화엄문헌을 고려의 의천(1055-1101) 으로부터 입수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후 혜인원에는 고려에서 전해진 문헌에 근거하여 교감하고 교정한 화엄문헌이 소장되게 되었다. 그리고 현존하는 송대의 화엄관계 저작의 대부분이 혜인원과 관련된 승려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보아도, 당시 혜인원의 교학이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남송대에서는 혜인원 승려인 가당 사회(可堂師會, 1102-1166)와 징강(澄江) 화엄사 주지인 소암 관복(笑菴觀復, 1141-1152)이 동별이교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하였다. 또한 혜인원에서는 이암 선희(頤菴善熹, 善喜 또는 善憙, 1127-1204), 무림 희적(武林希迪, 1202-1218) 등이 사회의 학풍을 계승하여 교학을 크게 떨쳤다. 한편, 일본에서는 관복․사회․희적을 포함하여, 정원과 동 시대의 잡계 도정(霅溪道亭, 1023-1100)을 오교장을 주석한 대표적인 인물로 삼아 「송대 사가」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주석을 상당히 참조하였다. 그 가운데 사회와 희적은 혜인원의 승려이다. 그러므로 혜인원의 교학이 일본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사회가 주로 관복을 비판하기 위해 활발히 저술하던 시기는, 화엄문헌을 수집하고 교정에 힘을 쓰던 원증대사 의화(圓證大師 義和, 1138-1165) 가혜인원의 주지로써 화엄문헌을 판각대상에 넣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것과 상관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또 사회의 학풍을 이은 선희나 희적 등도 혜인원에서 사회를 현창하는 저술을 짓고 있었으므로, 동사(同寺)에 계승되는 일종의 전통적인 교학이 탄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송대의 혜인원에서 전개된 화엄학은 어떤 것이고,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을까. 혜인원 승려들의 교학의 공통점은 화엄의 독존성에 대한 강조와 화엄조사의 상승설을 일관성 있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원이 주장한 화엄7조설을 사용한 점 등을 포함해 상당히 종파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남송대에서 혜인원을 거점으로 활동한 사회와 그를 잇는 몇몇 승려들의 교학이 교판론에만 전념할 정도로 종파적이었던데 기인한다. 특히 동별이교판 중에서 「동교」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화엄의 우월성을 드러낸 점을 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전체적인 경향이었던 융합적인 불교, 말하자면 종합적인 불교 동향과는 크게 다를 뿐 아니라, 화엄의 부흥기에 활약한 자선(子璿)․정원(淨源)․의천(義天) 등의 사상적 입장과도 다르다. 더욱이 사회의 「동교」에 대한 해석은 뒤에 혜인원의 주지가 되는 청원(淸遠, 1213)이 참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학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뒤에 활동하는 혜인원 승려들이 반드시 그 학풍을 선양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 일파의 교학은, 정원 이후 혜인원에 일관되게 흐르는 전통이라기보다는, 혜인원 및 그 주변에 한정된 영역 내에서 부상한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일시적으로 선풍을 일으킨 경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회 일파의 학풍은 그 근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지만, 혜인원에 고려 혹은 고려를 경유한 요(遼) 주변의 화엄학이 유입되고 사회가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므로 시야를 동아시아 전체에 넓힐 필요가 있겠지만, 이것은 이후에 계속해서 연구해 가야 할 커다란 과제이다. 본고에서는 이상과 같이 정원․의화․사회․선희․희적․청원 등 대표적 혜인원 승려들의 교학 경향과 그 특징을 파악하고, 그들의 학설에서 볼 수 있었던 공통점과 상이점을 확인하였으며, 나아가 당시의 사상사적 상황에서 혜인원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대해서 구명하려고 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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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Publisher :Korean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 Publisher(Ko) :불교학연구회
  • Journal Title :Korea Journal of Buddhist Studies
  • Journal Title(Ko) :불교학연구
  • Volume : 8
  • No :0
  • Pages :271~296